천년 신라의 숨결이 남아 있는 첨성대
관란이선생(觀瀾李先生) 창의비
임진왜란때 왜적의 침입과 피해를 보고 의병활동을 하신 효자 이승증선생을 기리는 유적지다
"경주이씨 교감공파 관란종친회"
첨성대 뒷편에 위치해 있다
첨성대 뒷편에 위치해 있는 인왕동 고분군
(사적 제 42호)
사적 제42호. 경주역 동쪽의 대부분이 도굴되거나 파괴된
고분 23기(19∼27호분, 147∼150호분 및 새로 발견한 10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분 중에서 1969년 제19 ·20호분은 경희대학 박물관팀이 발굴하였고,
1973년에 제149 ·156호분을 이화여자대학 박물관팀이 발굴했다.
제19호분은 13개의 석곽이 드러나서, 5∼6세기의 약 2세기에 걸친
가족공동묘지로 추정되었다.
이것은 신라 때의 일반적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었다.
껴묻거리[副葬品]로는, 토기 ·장신구 ·마구류와 은제환두대도 ·투겁창 등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사적 제 42호)
이곳 인왕동 일대는 경주에서 평지에 마련된 신라 시대의 고분 밀집 분포 지역이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의 상태로 남아 있다.
그 동안 경희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영남대학교의 발굴조사로
이들 무덤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즉 이 무덤들은 신라 시대의 직관목관분의 구조였고,
또한 금동장식 제품, 무기류, 마구류, 토기 등이 출토되어
신라 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영남대학교에서 발굴조사한 무덤은 조사후 내부구조를 그대로
영남대학교 야외 박물관에 옮겨놓았다.
국보 제 31호 첨성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