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에서 보리 비빕밥으로 향수에 젖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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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와 차 메뉴 |
보리 비빔밥의 야채 |
수제비와 반찬 |
보릿고개는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점심 식사시간 보다 좀 이른 시간에 들른 식당에는
두 테이블에만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잔잔한 카페 음악이 흐르는 실내는 시원하기도 했다
시냇물이 흐르고 작으마한 구름다리가 연결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서빙 아줌마는 주문을 받으로 왔다
파전 1개와 보리 비빕밥 3개...수제비 1개를 시켰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
어두컴컴한 실내지만 보일건 다 보이고 카페와 같은 분위기가
한층 더 식욕을 돋군다
인테리어는 예전과 변함이 없어도 오히려 낡음의 편안함이 좋았다
석가래는 더 어두운 색으로 짙어지고
황토를 바른 벽은 시골 고향을 회상할수 있는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꾸미지 않아도 투박한 멋을 스스로 발산을 한다
파전이 먼저 나왔다
오징어와 해물이 살짝 올려진 파전은 담백하고 맛이 있었다
셋이서 부지런히 젖가락 싸움을 하다보니 어느새 빈 접시만 달랑 남았다
드디어 보리 비빕밥이 우리앞에 놓여졌다
보리밥은 가마솥에 가득 담겨져 있고
크다란 도자기 그릇에 나물만 따로 담겨 있다
보리밥을 알맞게 퍼서 그릇에 담고 열무김치를 넣고
강된장과 고추장으로 비벼서 한입 먹으니
시장했던 마음이 급해서 저절로 행복해진다
보리밥이라 조금은 거칠지만 어릴적 먹던 보리밥보다는 훨씬 부드러웠다
예전에 초등학교에 다닐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제일 먼저 부엌부터 들어간다
그리고 저녁에 밥에 넣어서 먹을려고 삶아서 대소쿠리에 담아둔 보리밥을 퍼서
빈그릇에 넣고 열무김치 하나만 넣어서 고추장으로 비벼서 먹으면
그때의 그 기분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던지 ...
아련한 추억이 그리워서 가끔은 보리밥을 먹으러 다닌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 라는 옛말을 까마득하게 다 잊고
오늘 또 나는 그 행복을 누렸다
후식으로 나온 원두커피는 보리밥과는 궁합이 잘 맞지는 않지만
어쩌랴...다들 커피를 좋아하니까 이해를 해야지
전에는 후식으로 수정과가 나왔었는데...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후식을 없애면 너무 야박한것 같고...
쉽고 대중이 좋아하는 기호식품을 내기로 했나보다
너무 친절한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식당을 나왔다
보릿고개를 아세요?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라는 말이 있는데
보릿고개란 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 ~ 6월을 말하며 농가생활에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운 고비를 말합니다.
이렇듯 봄철이 되어 거둔 양식이 떨어지면 햇보리가 나올때까지
기다리기가 매우 어려웠으며,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즉, 그러한 보릿고개를 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행히 우리집은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밥을 굶어 본적은 없습니다
뒤주에는 쌀이 가득했고 쌀이 한가마가 들어 가는 커다란 옹기가
비어 있는 날은 없었죠 지금이야 쌀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고 살지는 않지만
그 시절에는 밥이 주식이고 간식거리도 별로 없던 시절입니다
그 당시에는 쌀이 귀해서 보리밥으로 밥을 해 먹기도 하지만
살겨( 쌀을 찧을 때 나오는 가장 고운 속겨)로
죽을 쑤어 먹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옥수수 가루로 죽을 쑤어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우유가루를 나누어 주기도 했었죠
철이 없었던 나는 강냉이(옥수수) 죽이 먹고 싶어서
내 도시락과 강냉이 죽을 바꾸어 먹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 김이 모락모락 나고 구수한 강냉이 죽은
지금도 잊을수 없는 나만의 추억입니다
그 시절이 얼마전의 일인것 같은데 쌀소비는 점점 줄어들고
가정에서 차지하는 외식비는 점점 늘어난다고 하니...
언제부터 우리가 잘 살게 되었는지...
지금은 보릿고개라는 말은 가끔은 드라마에서나
들어 볼수 있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무시무시했던 낱말인 보릿고개라는 상호를 단 식당에서
배 부르게 먹고 즐기면서 옛추억에 잠겨 봅니다.